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
이현수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1821년에 북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루앙(Rouen)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플로베르는 1840년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으나 건강 문제로 몇 년 후에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플로베르는 1850년에 소설 ‘보바리 부인’의 집필을 시작하여 5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였고 이를 1856년에 잡지에 연재 형식으로 발표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 소설이 비도덕적이고 반종교적이라는 이유로 작가와 출판사를 고발하였으나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보바리 부인’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호평을 받았고 세계적인 애독서가 되었다.
루앙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개업하고 있는 평범한 시골 의사 샤를 보바리(Charles Bovary)는 첫 부인이 사망하자 근처 마을의 엠마 루오(Emma Rouault)와 재혼한다. 연상의 과부인데다 괴팍한 성격의 첫 부인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던 샤를은 수녀원 기숙학교에서 공부한 미모의 처녀를 새아내로 맞아 들여 행복하다. 그러나 엠마는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샤를과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 아무 취미도 없고 둔감한 샤를로부터 그녀는 심적으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 틀에 박힌 따분한 일상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꾼다.
엠마의 건강이 나빠지자 쾌적한 환경을 찾아 샤를과 엠마는 다른 마을로 이사한다. 엠마는 그곳에서 세련되고 젊은 레옹(Leon)을 만나 그에게 끌리지만 그는 법학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나고 만다. 그 후 34세의 바람둥이 독신 농장주 로돌프(Rodolphe)가 집요하게 엠마를 유혹한다. 마침내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되고 엠마는 자기가 꿈꾸던 사랑을 찾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엠마가 로돌프에게 사랑의 도주를 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엠마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엠마는 큰 충격을 받고 몹시 앓는다.
건강을 회복한 엠마는 파리에서 공부를 마치고 루앙으로 돌아 와 일하고 있는 레옹을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은 곧바로 사랑에 빠진다. 엠마는 처음에는 피아노 레슨을 받는다는 핑계로 매주 한번씩, 나중에는 수시로 루앙으로 가서 레옹과 애정 행각을 벌인다.
샤를로부터 경제권을 넘겨 받은 엠마는 외상으로 사치품을 마구 사들이고 샤를 모르게 돈을 빌려 낭비하여 빚이 크게 늘어 난다. 그녀는 빚 상환 독촉을 받아 궁지에 몰리고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다. 가정에 경제적 파탄을 몰고 온 자신의 무절제한 행동에 대한 자책과 사회에서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수치심에서 그녀는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사랑하는 엠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비탄에 잠긴 샤를은 그녀가 남긴 빚을 갚아 가며 빈곤하게 살다가 우연히 로돌프와 레옹이 엠마에게 보낸 뜨거운 연정의 편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엠마의 외도를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그토록 갈망하던 엠마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이 차지했다는 사실에 절망한 샤를은 삶의 의욕을 잃고 곧 죽는다.
엠마는 인생은 자기가 소녀시절에 읽은 로맨틱한 소설에서와 같이 달콤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감, 충족감을 추구하기 위해서, 또한 권력, 선택권, 행동의 자유를 남성에게만 허용하는 사회 환경에서 모든 욕구를 억제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사는 여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일탈 행위를 한 것이다.
플로베르는 이 소설에서 실망스런 현실로부터 도피를 꾀하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한 여인을 그렸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엠마가 겪은 딜레마와 심적 갈등은 세대를 초월하여 독자들 사이에 논쟁 거리가 되었다. 또한 이 소설은 섬세한 심리 묘사, 정교한 서술, 그리고 유려한 문장으로 독자를 매혹한다.
특히 이 소설이 문학사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는 플로베르가 19세기 유럽을 풍미하던 낭만주의(romanticism)를 거부하고 사실주의(realism) 창작 기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자연, 인생 등을 미화(美化)하는 낭만주의와 달리 사실주의는 객관적 상태 그대로 충실히 묘사하는 문예 사조(思潮)이다. ‘보바리 부인’은 사실주의 프랑스 문학의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주의는 점차 낭만주의를 물리치고 프랑스 문학의 대세가 되었다.
플로베르는 부정확하거나 추상적이거나 진부한 문장을 기피하면서 완벽한 문장을 작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마음에 드는 한 페이지의 글을 쓰기 위해 일주일동안 고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에게는 글을 쉽게 쓰는 재능이 없으며 자신의 글은 퇴고를 거듭한 노고의 산물이라고 실토하였다. 이 때문에 그가 ‘보바리 부인’을 탈고하는데 5년이나 걸린 것이다. 플로베르가 추구한 미적(美的) 원칙과 완벽한 문체는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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